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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보자 팔짝

제 정신이라는 착각

 

 

...

지각과 생각, 행동에서의 비합리성이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실수의 비용을 계산하다 보니 나타난다는 생각을

오류 관리 이론 Error Management Theroy, EMT이라 부른다. 

...

비합리적 확신을 실수율을 더 높일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낮은 실수는 용인하고 높은 비용이 드는 실수를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

이런 종류의 지각 및 인지 왜곡은 화재경보기 원리를 따른다. 화재경보기는 되도록 지나치게 예민하게끔

설정되어야 한다. 아주 미미하고 아직은 위험하지 않은 연기에도 곧장 반응하게끔 설정되어야 한다.

소방대가 한 번 헛수고를 하는 것이 (물론 한 번 출동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하지는 않다.) 집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인명 피해가 생기는 것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훨씬 높은 비용이다.) 낫다. 연기 감지 장치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감지기가 연기를, 화재 위험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평가'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여기서도 세계를 가능하면 현실에 충실하게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순한 비용 - 편익 - 계산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두뇌를 설계하는 진화에게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는 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알 바 아니다'.

진화는 뇌를 굉장히 예민한 패턴 인식 기계이자 행위 감지 기계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생존하고 번식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비합리적 결론, 확신, 행등으로 이어지는 인식적 오르를 저지른다.

그러나 오류 관리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현실을 오인하는 것이 적응적일 수 있다. 

...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상이 부모나 교사, 다른 권위자(가령 의류 매장 판매원)가 진실이라고

전달해준 데 기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 Daniel Dennett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굉장히 방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모드 지식을 세부적으로 검증할 시간이 없다.

가령 당신이 한 부족의 구성원이고 그 부족에서는 건강한 아이를 얻기 위해 신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다면,

당신이 아이를 가졌을 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안전한 건 안전한 거니까! 

우리가 믿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리고 실질적 이유에서 세부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것에서) 그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보다는 누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햇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고 지적 설계를 믿는다면, 그건 그들이 과학자보다 자신에게 이런 '진실'을 가르쳐준 사람을 더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신뢰하는 사람들이 과학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적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확신을 형성하는 행동은 굉장히 적응적이다.

"자연선택은 어린아이의 뇌가 부모와 부족의 어른들이 하는 말은 뭐든 믿고 보겠끔 한다. "

 

- 필리프 슈테르처, '제정신이라는 착가', 4장 비합리성의 진화 - 

 

 

* 모두 맥락은 같다. 

철학이나 종교나 과학이나 결론은 엇비슷하고 상당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같은 의견을 내 놓는다.

줄을 따라 가면 그 곳에 목적지가 있는데 어느 줄을 잡고 왔는지의 차이일 뿐.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독립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래도 '내가 내다!'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과학은 참으로 편한 학문이다.

이것 저것 젤 것 없이 충분한 근거와 타당성으로 조목 조목 심문한다.

대들 기력도 없이 만들어 버리니 마음은 편하다.

수긍하면 되니까. 돌아서면 까먹든 어쨌든 간에.

 

이런 이과계열의 책을 오랫만에 읽어 본 듯하다.

관심도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진단이겠다.

예전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을 수가 없어서 줄기차게 읽어 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이름, 인상깊은 구절들, 필요한 수치 등을 대하는게 허술해졌다.

허술해지고 귀찮아지고 번거로워지고.

외우거나 숙지하거나 그런거와는 영 거리가 멀어 누가 물어보면 가물가물하다.

 

사회 초년기에, 주요 회의가 있으면 수치와 통계, 공신력 있는 자료 등으로 

회의시간에 싸움 닭 같을 때가 있었다. 

말단 사원의 패기와 논리력으로 한참 위의 상사들과 맞짱뜨는걸 즐기던 때였다.

그런 논리력과 호기가 먹혀 들었는지 진급은 빠르고 경영진에 이쁨도 받게 되고,

원래있던 근자감에 더해진 우쭐함이라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게 아닌데, 이게 진짜가 아닌거 같은데 하는...

그런 생각의 방향으로 삶이 전개 되면서 사회적으로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회에서는 수치, 논리, 구체적 출처 등이 밥벌이의 주요 도구가 되는 거니까.

그래야 샤프하니까.

 

알면서도 향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눈치챘을때에는 

'각오'라는 것도 하게 되었다. 

마치 지금 받아야 하는 불편함에 대한 변명거리처럼.

 

그래도 이렇게 연구하고 책도 내는 자신 삶의 방향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세계가 있을 수 밖에 없겠지.

 

어쩔 때는 이런 생각이 염세주의아닌가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그런 얘기 들을까봐 어디가서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걸 보면

그 정도의 슬기는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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