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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보자 팔짝

그 책은


...
9월 X일(X) 미사키 신이치
학교가 끝나고 교실에서 다케우치가 내 모자를 쓰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나는 "내놔!" 하면서 손을 뻗지만 진심으로 뺏을 마음은 없습니다.

영원히 쓰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여름보다 누그러진 석양이 다케우치의 하얀 양말에 닿아 흔들립니다.

다케우치의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울립니다.
이 학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아이는 내 친구 다케우치 하루입니다.
다케우치가 언젠가 교환 일기에 쓴 것처럼 "나를 잊지 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잊겠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둘이서 바다에 갑니다. 나는 그림책 작가가 됩니다.
다케우치도 그림책 작가가 됩니다. 둘이서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갑니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교환 일기는 30년 전 어느 날 끝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그림책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 모든 이야기에 그녀의 숨결이 있고 자취가 있다. 그녀는 내 친구이자 훌륭한 라이벌이기도 하다.
그녀와 같이 본 유성우를 30년 만에 일본에서 다시 봤다.
그 여름날 우리는 한밤중에 유성우를 보자는 매우 어려운 약속을 이뤄 냈다.

그리고 그 여름에 그녀와 했던 또 하나의 약속, ‘나를 잊지 마' 이 간단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

는 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아니 이 지구 상에서 우리가 없어진다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딘가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그림책을 만들며 미소띤 얼굴로 살고 있겠지.

이 책이 거리의 서점에 진열될 무렵이면 나는 여행을 떠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의 서점에, 어딘가의 책꽂이에, 그녀가 그린, 그녀가 그릴 터였던 그림책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싶다.

추신. 마지막 바다 그림에는 소년만 그렸다.
소녀는 언젠가 소중한 친구가 그려 줬으면 좋겠다.
                                                    
                                                    미사키 하루우미*.


- 요시타케 신스케/ 마타요시 나오키, 그 날은,
‘일곱째 날 밤‘ -


* 무덥고 지리한 날들,
내 마음같지 않은 일들로 무작정 걷는 것이 좋은 나날들.
무거운게 싫어 가벼운 책을 골라 봤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있으려나 서점’과 함께.

멍 하니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했던가?
책은 읽고 싶은데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길지 않고 짧은 단락 같은.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입맛에 어느정도는 맞아 떨어져 쉬는 시간같이 편하게 읽어갔다.
유쾌하고 발랄한 글들에 작가가 누군가 검색도 해가면서.

열 세개의 이야기 꾸러미로 구성된 이 그림책은 통통 튀기도 하고 부드럽게 진지하기도 하며

한편 뭉클하기도 하다. 그 ‘뭉클’함은 ‘일곱째 날 밤’이야기로, 마음을 한 없이 풀어 헤친 채 유쾌함에 빠져 있다가

‘당해’버렸다. 빠르게 끝으로 향하며 짧은 조짐 후 급하게 마무리 되어 더 온전히 ‘당한 것’ 같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쿵’하는 아련함.
그 아렴함에는 젋은 청춘의 마감, 순수하게 깊게 좋아하던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

긴 세월동안 마음 한 켠에 깊게 뿌리 내려있는 그 추억 그

리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 추억을 돌아보는 소회 등 여러 감정들이 비빕밥처럼 섞여 있다.
아마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삶의 매정함으로 포기되어 졌을테고,

그러하기까지는 셀 수 없음 정도로 많은 그리움과 보고 싶음과 안타까운 세월들이 지나 갔을터...
누구나 비스무리한 추억과 기억들이 있다. 내용은 달라도 감정은 비스무리한.

이야기의 마무리인 추신을 읽고 뭉클함 속에서 그 전에는 몰랐었던 가슴에 나 있는 구멍을 보았다.
큉한 작은 구멍이 아니라 온 전체가 커다랗게 뚫린 동굴같은 구멍을.

무엇에 매몰되어 지내는지도 모르고, 아니 아예 그런 류의 생각은 시작도 하고 싶지 않은 채로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이벤트들에 잠시 잠시 불이 켜졌다가는 곧 점등되어 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 이 이야기에 빠져 흠뻑 태워져 버렸다.
너무 오랫만에 만나 슬프기까지한 반가움으로.

딸 아이에게 이 이야기 부분만 읽어 보라 하였다.
다 읽고나서 과연 이 어린 아이는 무엇을 보았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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