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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보자 팔짝

어리석은 인간을 논함

 
 
황정견은 안기도의 「소산사』를 위해 지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에 숙원(안기도)에 대해 사람도 걸출하거니와 그 어리석음도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한 적이 있다.
(...) 관직생활에서 굴곡을 만나도 지위 높은 사람의 대문 근처에
얼씬도 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하나의 어리석음이요,
글을 논함에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새롭게 앞서가는 선비들의 문투를 따라 글을 짓지 않으니
이것이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요,
거금을 아끼지 않고 쓰되 집안 식구들은 춥고 배고픈데도 안색은 어린아이와 같으니
이것이 또 하나의 어리석음 이요,
수많은 사람이 등 을 돌려도 원망하지 않고 한번 사람을 믿으면
자신을 속인 사람을 끝내 의심하지 않으니 이것이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다.

황정견이 묘사한 북송의 시인 안기도는 '어리석은 인간' 이다.
그의 '어리석은 감정'과 '어리석은 태도와 '어리석은 행동은 정말 천진하고 사랑스럽다. 
...
안타깝게도 지금 이 사회에는 천징룬, 허치팡과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 갈수록 적어지고,
반면에 교묘한 인간과 영리한 인간은 갈수록 늘어난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데서도
어리석은 감정은 아주 부족한 반면 어떻게든 돋보이려는 감정은 지나치게 많다.
현대의 사회생활은 대부분 이익의 원칙에 지배된다.
눈앞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인류는 갈수록 총명해지고, 각종 생활의 기교는 갈수록 능수능란해지며
이른바 '사회적 효과에 갈수록 신경을 쓴다. 부지런하게 목표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미련하고 고집스럽게 추구한다면 남들에게 우둔하다는 비웃음을 살 뿐 아니라
먹고살아갈 수도 없고 발 디딜 곳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륙에서는 과거에 '실제'와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지금은 실익과 결합하는데 신경을 쓴다.
때문에 실익에 한눈팔지 않고 목표를 고집스레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욱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바로 이 점에서 느낀 바가 있는 나는 온갖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생각나고 소식의 자조 섞인 시구도 생각난다.

"나를 우둔한 노인네라 비웃을 만하네.
어리석게도 뱃전에 새긴 칼자국만 기억하니" 

나는 늙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벌써 우둔한 면을 갖고 있어서 많은 일을 에둘러 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든 간에 나는 아주 총명한, 두뇌 회전이 빠른 자들과 뺀질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늘 어리석은 인간들과 힘없는 백성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아마도 미래의 세계는 두뇌 회전이 빠른 자들과 뺀질이들의 세계가 될 것이고
어리석은 인간과 백성의 세계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어리 석은 인간을 논함」이라는 글을 썼다.
이 또한 역사의 뱃전에 새기는 칼자 국인 셈이다.

류짜이푸, 인간극장(人性諸相), '어리석은 인간을 논함'


* 예전 한창 선방을 기웃거릴 때가 있었다.
그 세계에 대한 확신은 그 만큼의 동경이 되었기에 문득 마음이 동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산으로 가곤 하였다.
나와의 결혼을 고대하던 당시 (나에게는 과분 했던) 여자친구도 나의 그런 행태에 홀연히 떠나 버렸다.
후에 어찌 통해들은 바로는 내가 언제 출가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컷었더란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던 여자에게는 가장 커다란 위험요소였던 셈이다.

그렇게 선방을 다니고 선승들과의 만남을 좋아하다보니 당연히 현실적인 생활은 엉망이 되어 있던 때다.
그런 나를 보며 친한 선승께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마을에는 마을의 법칙이 있는데 어찌 그리 산승 흉내를 내며 산단 가요.”

이런 나의 경계를 사는 모양새는 타고난 듯하여 내게 명리학을 기르쳐 주신 선생님께서도
곤중(문지방)이라는 호를 만들어 주실 정도였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삶을 산다면서.

인연이 되었는지 결혼하여 딸아이를 키우게 되었는데 언제나 저런 ‘어리석음’과 ‘총명함’의 선택을
강요 받는다. 물론 내 성향상 ‘어리석음’에 기준이 많이 기울어져 있지만,
그로인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기에 ‘총명함’을 떠나지는 않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뜻은 하늘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어째든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기에 마을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을의 법칙에는 어느정도의 이기심, 어느정도의 의심,
어느정도의 교활함(정치) 등 어느정도를 갖추어야 어느정도 만족(행복)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노는 것이 가장 좋고 잠이 오면 안아 달라는 딸 아이가 그 ‘어느 정도’를
슬기롭게 갖추어 나갔으면 좋겠다.
나와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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