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보자 팔짝

젊은 날의 초상

mydoorstone 2024. 2. 2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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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지 십 년이 넘는 지금 다시 그대를 불러보는 나의 감회 새롭고도 애련한 바 있다.

근년에야 듣게 된 소식은 두 아이를 둔 그대 가 어느 작은 도시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적인 견해로도 전락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고, 더더구나 불행과는 도무지 연관지을 수 없음에도,

그와 같은 그대 삶의 유전은 내게 자못 충격적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우리 시대에서 다음 세대를 기른다는 것 이상

더 확실한 가치도 없을 터이지만,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곳이 나의 예측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헤어져 보낸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종종 어느 화려한 성에서 고귀한 안주인이 되어 있는 그대를 상상했고,

때로는 그대가 아름다운 날개를 하늘거리며 거룩한 천상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꿈꾸기도 했었다.

젊은 나를 괴롭혔던 몽상의 일부에 불과하고, 또 그 때문에 비뚤어진 나는 우리들의 만남을 서둘러 그 우울한 결말에

이끌어 간 것이지만, 그렇게 턱없이 그대를 보내고만 것은 지금에 조차도 뉘우침과 아쉬움이다. 그

러나 어쩌랴. 그때 우리에게 삶은 다만 몽롱한 가능성이었고 사랑은 혼란과도 비슷한 하나의 추상이었음에.
그리하여 우리가 불 같은 열정으로 몰두한 것도 실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이름을 가진,

가끔 심각하긴 해도 대개는 요란하고 실속 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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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

 


* 하필이면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문열을 만났다.
오만하고, 충동적이고, 반항적인 시기였다.
한참을 듣던 Rock은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줏어 읽던 철학서나 사상서들은 이문열의 책을 읽으며,
들판에 불이 번지듯 오만함이 제 세상을 만났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다닌던 시기까지 많은 책들을 읽으려 애를 썼었지만

앎의 즐거움에 빠져 있을때라 수월하게 강도 높은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목마름도 있었겠지만, 겉 멋의 수준을 못 벗어나는

교만과 오만이 월등한 동기였던 것 같다.

당시에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주 정확히, 그 기세와 달콤함에

모든 이성의 운전대를 놓고 유유히 그 알싸한 독의 기운을 음미하였다.
홀로 스스로의 세상에 취해 마음껏 비웃고, 가식적인 겸손의 가면도 없이 오만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래도 되던 시절이였다. 아니 오히려 그 시절은 그래야 제대로 보내는 것이다.
그래야 반성과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진정한 겸손함도 갖게 되는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
너무도 먼 시절의 풍경이지만, 너무도 뚜렷하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피어오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