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보자 팔짝

봄날은 간다

mydoorstone 2023. 4. 29. 20:57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런지

- 기형도, ' 봄날은 간다', 입속의 검은 잎 -


* 이 무더위...
봄이 가긴 가려나 보다.
꿈꾸던 모든 것들을 덮어둔채.

오늘은 비오는 오전,
저녁엔 막걸리가 아니라 한 입에 털어넣는 위스키가 그리울테다.
흩어져 있는 땅콩 몇개 집어들며.

이제 그런 정다운 유치함을 언제고 들어줄 사람들은 영영 사라져 버렸을지라도...
유치한 삶을 살면서 유치함을 경멸하다니.

행복하여라 들,
내게서 멀어진 것들은 모두 모두.